과메기로 보는 주식의 기원(동인도회사의 역사)
여러분들 과메기 좋아하시나요?
지금의 주식시장은 이 과메기 덕분에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겨울철에 말려서 먹는 과메기라고 부르는 생선은 원래 청어입니다.
기름지고 맛이 좋은 데다 말리면 독특한 풍미가 있어서 유럽 쪽에서 특히 인기가 좋았는데요.
이 청어는 발트해에서 많이 잡혔어요. 그런데 1425년 해류가 변하게 되면서 네덜란드 앞바다 북해에서 청어가 잡히기 시작하였습니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대부분이 해수면 아래에 존재하는데, 지금이야 제방을 쌓아 땅을 그럭저럭 쓸만하게 바꿔 놓았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늪지대 였습니다.
그래서 농사는 물론이고, 목축업 따위도 하기 힘들어서 항상 먹을 것이 귀했답니다. N분의 1을 뜻하는 더치페이도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래된 말인데요. 이때 네덜란드는 항상 음식이 부족하니까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해도 자기가 먹을 음식은 자기가 스스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네덜란드에 청어 떼가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니까 당연히 너도 나도 청어잡이에 뛰어들었겠죠?
당시 네덜란드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는데, 3분의 1인 30만 명이 청어잡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잡히고 맛도 좋아서 인기가 많은 청어였지만, 빨리 상해버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청어잡이 어부들은 오랜 시간 조업을 하지 못하고 청어가 상하기 전에 항상 급하게 되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1358년 '빌렘 벤켈소어'라는 한 어부가 청어를 잡자마자 배 위에서 머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여서 보관을 하는 선상 염장법을 개발하였는데요. 이 덕분에 조업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이때가 고려시대 말 쯤 되겠네요. 아무튼 당시 유럽은 식량도 부족하고, 당연히 냉장고도 없던 시절! 보관 기간을 획기적으로 늘려준 선상 염장법 덕분에 절임 청어는 전 유럽에서 인기가 높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럽은 대부분 기독교 국가였는데 금식일이 1년에 4분의 1을 넘었다고 합니다. 금식일 기간 동안에는 육식을 먹을 수 없고, 생선은 먹어도 되었다고 해요. 네? 뭐... 어쨌든 이런 이유로 네덜란드의 절임 청어는 유럽 전역에서 불티나게 팔리게 되었습니다.
절임 청어를 만들 때 쓰는 소금은 대부분 독일이나 폴란드산 암염을 수입해서 만들었는데요.
이 때 스페인에서 쫓겨나 네덜란드로 건너온 유대인들이 암염 대신에 값싸고 질 좋은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의 천일염을 수입하면서 암염을 대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금의 상권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곧 청어 사업까지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어업위원회를 통해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했고, 가공품의 중량과 포장규격 등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서 절임 청어의 품질 관리를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수협과도 같은 '어업위원회''어업위원회'를 만들어 네덜란드 의회로부터 법적 권리를 부여받아 청어 산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감독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네덜란드 청어 산업은 더욱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유럽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청어 잡이가 호황을 누리자 고기잡이 배들도 많이 필요해졌고, 네덜란드에서 고기잡이 배들을 많이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선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화물선의 건조능력도 좋아지게 되어 해운업도 발달하게 되었지요.
청어잡이라는 수산업에서 시작한 네덜란드의 산업은 배를 만드는 조선업과 해상 운송을 책임지는 해운업의 발달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유럽 물류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